칼빈의 가난의 신학

이글은 고려신학보 제25집 (1993)에 실린 '신원하'고신대 교수의 글 "칼빈의 가난의 신학과 윤리" 중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

II. 칼빈의 가난의 신학
A. 하나님의 헝상으로 창조된 인간

가난한 자에 대한 칼빈의 관심은 그의 인간관에서 출발한다고 할 수 있다. 그의 기독교 강요에서 칼빈은 인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인간은 하나님 형상으로 창조되었고'(창1:27) 그래서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마치 거울을 보는 것같이 인간을 보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있게끔 그렇게 인간을 창조하셨다.

칼빈은 모든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실이야 말로 우리들이 이웃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또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를 결정케 하는데 가장 중요하고도 근간이 되는 진리라고 생각했다. 즉 우리들이 사람들을 바라볼 때에는 그들이 어떤 사회적인 위치와 능력과 도덕성을 지니고 있건 간에, 그러한 외적인 요소 이전에 무엇보다도 그들이 우리가 마땅히 존귀히 여기고 사랑해야할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그러한 인간임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한 가지 분명한 진리는 인간은 가난한 자이든 부한 자이든 누구나 동일하게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자들이라는 진리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존귀히 여기시고 형언할 수 없는 사랑으로 대하시기에 만약 어느 사람이 다른 인간들의 잔인성과 사악함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고 신음을 하게 된다면 그 고통당하는 사람 안에서 하나님 당신이 직접 함께 깊은 상처를 받으시고 아파하시고 고통을 받으신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칼빈에게 있어서, 이웃에게 해를 가하는 행위는 즉각 하나님을 해하는 행위로 간주되어졌다. 바로 이와 같은 생각의 기반과 지평에서 그는 인간의 가난과 고통을 이해하고자 했다. 즉 칼빈은 인간이 겪는 그 빈곤과 가난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깊이 근심하시고 고통스러워하신다고 주장하면서 인간의 고통과 함께 신음하시는 창조자 하나님에 대해 묘사하면서 피조물인 인간의 고통을 조장하는 것은 하나님을 고통 속에 몰아넣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마땅히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모든 인간들을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은 우리가 이웃이나 다른 사람을 볼 때마다 반드시 우리는 다른 사람이란 거울 속에서 우리 자신을 보아야만 한다고 주장한다. 칼빈은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형상을 지닌 한 육체와 한 본성에 속해 있는 단일성을 지닌 사람들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전 인류는 한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이고 모두 이웃들이다.

따라서 칼빈에게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이 사실은 창조의 중요한 질서를 결정지어 주는 것이다. 즉 모든 인류가 교제의 거룩한 고리로 연합되었다는 것이며 그러기에 서로서로 도우며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칼빈의 이와 같은 인간관은 그의 가난에 대한 신학의 구조를 구성하는데 기둥과 같은 역할을 하고 있으며 특별히 부자와 가난한 자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해 설명할 때 중요한 이론적 토대가 된다.

B. 하나님의 신비로서의 가난
칼빈은 물질적인 축복이 근본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의 물질적인 풍요 그 자체가 경건한 삶을 산 의인에 대한하나님의 축복이라든지 또는 개인적인 선행과 의로움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의 표시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더욱이 칼빈은 빈곤 그 자체가 경건하지 못한 사람들 개개인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의 증거라고는 더욱 생각하지 않았다.

또 한편으로 칼빈은 빈곤 그 자체가 어떤 본유적인 가치를 소유한다는 그러한 생각에 추호의 동의도 하지 않았다 이점에 있어서 그는 중세 사람들의 일반적인 가난에 대한 생각과는 궤를 달리하였다. 칼빈은 자발적인 청빈과 가난의 사상을 강조하면서 종교적으로 빈곤을 고양시키고 가난을 찬양하는 중세적인 입장과 태도에 비판적인 자세를 취하였다.

가난이 어떠한 성격과 특성을 지니고 있든지 간에 가난과 빈곤은 우리 주위에 항상 있어 왔고 또 앞으로도 계속 인간 사회에 존재할 것이다. "너희에게는 항상 가난한 자들이 있을 것이다" 라는 신 15:11의 구절은 가난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하나의 중요한 구절이다. 예수께서도 요 12:8에서 이와 비슷한 말을 하신 바 있다.

그러나 칼빈은 이러한 성경 구절들을 피상적이고 숙명적으로 이해하기를 거부한다. 왜냐하면 숙명론적인 가난에 대한 이해는 자칫 잘못하면 현 사회체제의 현상유지(status que)를 옹호하는 이론적 수단으로 전락하고 말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은 이와 달리 가난을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신비스러운 방법을 가리켜주는 그러한 지침계로 이해하고자 한다.

왜 하나님께서 빈곤을 인간들에게 존재케 하셨는가? 이것에 대한 설명은 하나님께서 가난한자 부자 모두에게 그의 특별한 교훈을 주시고 교육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민 15:11 -14 대한 강론에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설교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부자가 되고 어떤 사람이 가난하게 되는 것을 볼 때에 그것을 단지 운(fortune)의 탓으로 돌리지 않는다. 하나님이 사람들의 후의와 친절을 깊이 살펴보기 위해 이 세상의 재화들을 불공평하게 분배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시험하시는 것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풀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그러한 수단을 소유하고 있을 때 그가 관대한지 아닌지를 알아보는데 있어서 이 재화는 좋은 증거가 될 것이다. 다른 가난한 사람의 경우 비록 그가 고통을 받고 있고 그가 힘든 상태에 놓여있다 하더라도 악하고 그릇된 방법을 사용해서 힘든 상황을 넘기려 하기보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를 보내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를 깊이 생각한 수 있다면 이 경우에 있어서 가난은 이 사람의 영적인 상태와 믿음을 시험하는데 참으로 훌륭하고 유용한 수단이 되는 것이다.

특별히 가난한 사람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은 부서지지 아니하는 정금과 같이 단단한 그러한 수준의 신앙을 요구하시고, 부자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동일하게 지음 받은 그의 이웃에 대한 관심과 사랑의 관대함을 요구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선을 베풀려 하고 사랑에 의한 구제의 마음이 있는지를 테스트하신다. 만약 어떤 사람이 그의 수중에 베풀 능력이 있을 때 그는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에게 도움을 베풀되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나 교만함으로 하지 않도록 해야 하고 겸손하게 행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것이 중요한 테스트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므로 부와 가난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은혜의 통로가 되고 인간 편에서는 신앙을 증명해 주는 좋은 수단이 된다. 물론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빈곤을 즉각 제거하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신앙을 시험해 보시고 굳게 하시기를 원하신다. 중세기에 이르는 시대까지 교회는 전통적으로 부자들에게 선행을 연습할 수 있는 좋은 과제로써 이 가난을 이상화했고, 또 한편으로 사람들로 하여금 경건한 삶을 영위해 나아가는데 좋은 조건이 되는 것으로 가난을 이상화 하였다.

이 같은 점에 있어서 칼빈은 비록 가난이 구원의 수단이나 또는 성화의 수단이라고 보지는 않지만 가난을 하나님의 신비스러운 교육수단으로 말하고 있는 점에서, 칼빈의 가난에 대한 이해와 가르침은 고대 기독교적인 사상의 흔적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C. 맞서 싸워야 할 빈곤
칼빈이 가난이라는 것을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교육하기 위해 사용하는 하나의 신비로운 방법이라고 말하긴 했지만 그는 결코 가난 그 자체를 덕목으로 간주하거나 미화하지는 않았다. 칼빈은 빈곤이란 인간들이 모두 힘을 합하여 인간 세상에서 퇴치해야 할 것으로 보았다. 이같은 이유로 인해 그는 빈곤을 조장했던 탁발행위를 신랄히 비판했다 그는 구걸을 일종의 게으름으로 보면서 이것은 하나님의 인간을 향한 뜻을 거스리는 죄일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심각한 악으로 생각했다.

칼빈은 빈곤을 인간사회로부터 추방하고 제거하기 위해 인류의 연대성(Solidarity)에 호소했다. 그는 만약 우리가 가난한 자들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의 이웃이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느끼게 된다면 어떤 사람들은 과도히 누리며 사는데 어떤 이는 핍절한 채로 살게 방치할 수 있겠느냐고 물으면서 이런 일은 결코 그리스도인에게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단언하였다 따라서 모든 사람은 서로에 대한 연대책임을 지녀야 하고, 서로를 도우면서 살아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맥락에서 부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이 많지만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기에 자기들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체 공동체의 필요를 채우는데 사용하여야 되는 것이다. 칼빈에게 있어서 인간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을 받아 관리하고 그것으로 이웃을 위하고 돕는데 사용하는 청지기일 뿐이다. 16) 칼빈은 고용한 노동자에게 정당한 삯을 지불하지 않는 부자 사용주를 가리켜 "살인자, 포악한 짐승, 가난한 자를 물어뜯어 그들의 피를 마시는 자"라고 극단적인 표현으로 묘사하면서 혹독한 비판을 서슴지 않고 있다.

칼빈은 그의 고린도후서 주석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상속받았거나 자신의 자산과 노동으로 벌었든지 간에 부를 많이 소유한 자들은 자기들이 필요한 재산 외에 남는 재산을 무절제하게 사용하거나 사치하게 써서는 안 되고 다른 궁핍한 형제들의 필요에 따라 그들의 빈곤을 덜어주는데 사용해야 함을 명심해야 한다.

계속되는 이러한 글은 칼빈 생각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 주는데, 칼빈은 빈곤함으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이웃의 괴로움을 완화시키는데 우리의 부가 사용되어져야 함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칼빈은 가난한 자들을 돕는 주된 동기가 무엇보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이웃에 대한 사랑에서 출발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궁핍한 상태에 있는 형제의 비참함에 대한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연민의 감정이 없이는 그 어떠한 도움의 행위도 진정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도움의 손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칼빈은 강조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사랑의 원리'가 가난한 사람을 돕는 가장 중요한 동기가 되어야 함을 주장한다.

그러나 칼빈은 그리스도인들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서 그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모두 나누어 주어야 한다는 생각에는 반대하였다. 몇몇 급진적인 재세례파들의 마태복음 19: I6~26과 사도행전 2'41~45의 해석을 검토하면서 칼빈은 그 부분들을 그들과 달리 해석한다.

부자청년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해야 영생을 얻겠습니까(마 19:16)"라는 질문에 응답하면서 주님은"네가 온전해 지려고 하면 가서 너의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칼빈의 해석을 따르면, 예수님이 강조하시는 '온전해 지는 것'에 대한 핵심은 모든 소유를 파는 데에 있는 것이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예수님의 답변의 의도는 부자청년이 그 자신의 선행에 대해 갖는 확신이 얼마나 눈이 먼 것이었는지를 밝혀 드러내어 보게 함으로 자신이 결코 구원 얻을 만한 선행을 할 수 없음을 깨닫게 하는, 즉 그 자신의 연약함을 철저하게 자각하게 되어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오직 믿음을 통하여야만 한다는 것을 진정으로 깨닫게 하려 하심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와 아울러 칼빈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초대기독교회의 상황에 대해 설명하면서, 그 상황에 대한 성경의 묘사는 초기 예루살렘 공동체에 있었던 극심한 가난과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취해졌던 일시적인 조치에 대한 것이고 그것이 결코 그리스도인 경제원리의 모델과 표준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칼빈은 개개인의 사유 재산의 권리를 결코 부정하지 않았다. 가난에 대한 칼빈의 신학은 앞서 살펴본 것처럼 칼빈의 인간관 즉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자로서의 인간에 대한 그의 신학적인 이해가 주근간을이루고 있다.

비록 가난이 하나님의 교육 도구로써 사용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지만, 그는 가난 자체를 결로 이상화하지 않았고 오히려 인간들이 힘을 합쳐서 인간 사회에서 퇴치해야 할 것으로 믿었다. 바로 이런 신념이 그로 하여금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개인적인 차윈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제도화하여서까지 가난한자들을 위해 헌신할 수 있게 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