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반포중앙교회 박상봉 강도사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수고와 노고를 주사
전 3:9-11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우리는 현실과 미래를 위해서 많은 수고를 한다. 그리고 이로 인하여 많은 생각들이 우리의 머리 속에 있다. 그럼에도 이와 관련된 생각들은 인생을 살기 위해서 결코 피할 수 없는 통과의례적 고뇌들이다. 아무튼, 모든 인간들은 많은 일들과 다양한 사건들을 겪으면서 현실과 미래에 관련된 많은 생각을 하게 되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실재적인 물음과 고민을 한다.
특별히, 성도들에게 있어서 삶의 실존의 자리가 완성된 천국이 아니며, 이 세상은 계속해서 진보해야 한다는 사상으로 가득해 있는 이상, 또한 인간이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물질적인 가치들이 상식이 되어가는 시대의 풍조 속에서 인생을 좀더 가치있게 살아가기 위해서 현실과 미래에 대한 삶의 고민은 상식적이고 필수적이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회의주의 혹은 염세주의에 푹 물들어 있는지도 모른다. 고작, 이 시대의 가치란 단적으로 표현하면 “안락과 편안함” 그 자체이다. 그 이상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러한 삶의 추구들은 비단 한국 사회의 가치만이 아니라, 인간이 사는 곳은 다 동일할 것이다. 이러한 감당하기에 벅찬 삶을 살기 위해서, 이미 거기에는 인생이 사는 목적, 삶의 의미, 생의 가치가 무엇인지에 질문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어느 인생의 말처럼, “삶의 의미를 알고 사는 것이 필요한가? 살아 있기에 열심히 살면 되지 않는가?”라는 말이 이제는 이 시대의 한 정신이 되어가고 있다. 그러나 이는 전형적인 회의주의자의 답변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의 시대는 풍요 속에서 인간의 가치를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정신적이고 종교적인 가치들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실, 죽음을 기점으로 해서 인생을 생각한다면, 산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수 있다. 인간이 죽지 않는다면 산다는 것 자체로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 속에서는 인생에 대한 진지한 물음이 필요없는 것이다. 그러나 죽음이 인생의 끝인가? 문제는 여기에 있다. 종교적이고 철학적 물음은 이 문제를 간과하면서 인생의 문제에 대한 답을 찾지 않는다. 그리고 인생은 그냥 살다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는가? 이것 역시도 아니다. 단순히, 시간의 흐름 속에서 생성된 역사적 산물들도 이 사실들을 증언해주고 있다. 지금에 와서는 빛 바랜 골동품에 불과한 역사의 산물 안에는 인간이 얼마나 간절히 “불멸과 영원”을 꿈꾸어 왔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예로부터, 인생들은 죽음이란 새로운 시작이요, 또 다른 생에 대한 출발선으로 인식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사실 속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생을 허락하셨을 때, 고작 “평안과 안락하게 사는 것”에 생의 가치를 주셨겠는가? 평안과 안락함은 삶의 목적이 아니라, 삶의 요소일 뿐이다.
이제, 인간이 좀더 인간답기 위해서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인생을 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에게 각자의 고유한 삶을 허락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에게 있어서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현실과 미래를 위한 고민에는 이러한 질문이 사실적이고 중심적인 주제로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 이 물음들은 한국에 사는 인생들만의 물음이 아니라, 현실과 미래를 살아가는 인간 본질의 물음들이다. 결국, 이러한 질문들 속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실존적 현장을 이해해야 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겪는 많은 일과 다양한 사건의 의미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특별히, 이러한 물음들 아래서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인간의 수고와 노고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확인해야 한다.
인생의 의미와 가치가 어디로부터 온다고 생각하는가? 인생이 살아가면서 겪는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의지와 작정, 그리고 창조와 인간의 타락이 어우러져 발생하는 것들이다. 특별히 인간의 수고와 노고라고 할 때, 그 말들은 창조 이후 타락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타락 이전에 인간에게 일이라는 것이 없었겠는가? 죽음 이후 천국에서 일이라는 것이 없겠는가? 아닐 것이다. 다만, 그 일에 수고와 노고, 불평이 없을 뿐이다. 실제로, 일이라는 것은 인생들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일은 그 자체로 고귀한 것이고, 인간이 살아있다고 할 때 일은 그 사실에 대한 지대한 반증이다. 살아있다는 것은 것 움직인다는 것이고, 그 움직임은 일과 무관하지 않다. 일하지 않는 인생이 행복한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일하지 않는 인생들의 부류는 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 모습이란, 인간에게 그렇게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분명한 것은, 일은 처음부터 있었고 다만 하나님이 타락한 인간에게 수고와 노고를 주신 것이다. 타락 이후에는 일을 하는데 노력이 있어야 하고, 인내가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수고의 정도에 따라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기뻐하기도 하며, 불평하기도 하게 되었다. 즉, 하나님은 타락한 인생들에게 수고와 노고 속에서 어떤 성취를 얻게 하셨고, 먹을 것이 있게 하셨으며, 보람이 있게 하신 것이다.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때의 수고와 노고의 의미에는 부정적인 의미에서의 타락 이후 인생들에게 주어신 삶의 짐으로만 여길 수 없고, 긍정적으로는 어느 정도 죄를 억제하는 도구적 의미를 가질 것이요, 그 수고와 노고를 통해서 영원한 안식을 추구하게 하는 영적인 가치 역시 담겨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그 마음에 없는 인생은 오직 땅에서 나오는 소산을 먹기 위해서만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때문에, 그들의 생의 의미나 가치도 여기에서만 나오는 것이다. 그 땅의 소산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배를 위한 것이다. 참 생명이나 가치와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따라서, 하나님이 없는 인생이란 온 삶을 여기에다 투자하고 산다. 인생의 배를 채우는 것에 목숨을 거는 것이다. 물론, 인생의 배를 채우기 위한 수고는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만을 위해 인생을 사는 것은 문제가 있다. 오히려, 그것보다는 평생 거지로 살아간 나사로처럼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음식부스러기를 먹고 참 생명을 얻는 게 낳지 않겠는가? 적어도, 이러한 물음을 하며 사는 것이 창조된 인간의 본래적 모습이다. 인간 본질에 있어서 절대 가치는 변함이 없다. 하나님이 없이 인간을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없이 인간만 생각할 때, 그 인간이란 스스로 혼돈 속에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서 어떤 선한 것이 있는가? 일의 수고와 노고를 통해서 인생이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그것을 주신 자를 확인하는 것이요, 영원한 쉼을 기대하는 것이다. 인생들은 자신들이 하는 수고와 노고 속에서 영원한 것을 보는 데까지 가야 한다. 그래야 그 수고와 노고가 인생들에게 참된 유익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두고 비로소 “직업적 소명”이라는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때문에, 하나님이 그 마음에 있어야 인생의 모든 것은 가치가 있다. 하나님이 그 마음에 있어야 한다. 하나님이 그 마음에 있을 때에는 인생에게 수고를 주신 이유를 바로 깨닫게 된다. 그 노고 속에서 참된 삶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 마음에 있을 때는 삶 자체로 귀하고 버릴 것이 없으며, 이러한 사실 속에서 수고와 노고까지도 귀한 것으로 여긴다. 분명히, 성경은 성도의 인생 속에서 발견되는 힘든 수고와 노고를 우리로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게 하고,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인격을 만드시기 위해 허락하신 것으로 이해시킨다. 하나님이 없는 인생은 자신의 배 만을 위해 수고와 노고의 삶을 살아가며 그것을 벗어나고자 애쓰지만, 오히려 성도는 수고와 노고 속에서 삶의 가장 가치있는 것들을 생각하고 그 자신을 연단하고 훈련하는 장으로 삶는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수고를 주신 이유는 그 수고의 열매를 먹는 데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인생들은 이러한 수고를 평생에 해야 하는데, 그 원인과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를 발견하는데까지 가야 한다. 바로 영적인 가치이다.
그럼으로 성도의 삶 속에서 평생을 두고 펼쳐지는 수고와 노고는 단순히 인간의 배 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수고와 노고를 이 세상의 것으로 바꾸지 않아야 한다. 우리의 수고와 노고를 통해서 영원한 것을 사모하고, 자신의 영원한 삶을 준비하는 기회로서 삼아야 할 것이다. 수고와 노고 뒤에 예비된 영원한 안식을 기대하며 소망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어떠한가? 인간의 수고와 노고는 현실적 문제를 해결하는 내용으로만 존재한다. 때문에, 거기에는 수고와 노고의 문제가 능력과 계층의 문제로 남아있다. 소유와 분배적 가치를 결코 뛰어넘지 못하고, 이 사실에 인간의 실존적 가치를 두는 것이다. 결국, 학력이 문제가 되고, 직업이 문제가 되며, 소유 정도가 문제가 된다.
당연히, 모든 인생들은 각 자의 자리가 있다. 지극히 상대적이지만 부여된 재능에 따라, 수고와 노고의 정도에 따라,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자신의 위치가 있고, 역할이 있다. 그럼에도 이때 각 인생들이 갖는 고유성과 관련하여 각 자의 삶의 자리는 그 자체로 가장 소중하고,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가난과 부, 존귀와 천함의 문제는 타락한 인간의 본질 속에서 파생된 문제이자, 사회적 삶을 살아가는 인간의 효율성의 문제이지, 그것을 천부적인 것으로 받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천부적인 성격은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고유하게 허락하신 은사와 다양한 삶의 풍경 속에서 자신에게만 주어진 유일한 실존적 자리, 그리고 신비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섭리가 결합되어 드러나 삶 그 자체이다. 따라서 사람이 사람을 평가할 때, 이미 그 자체는 타락의 본질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요, 하나님이 그에게만 주신 고유성을 파괴하는 성격을 갖는다. 주님이 간음 중에 잡힌 여인을 향해 돌로 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죄없는 자가 먼저 치라” 하셨을 때에, 이미 거기에는 창조하신 자의 타락한 인간의 본질을 향한 직시와 인간은 다른 인간을 향해 자신과 다른 차별성을 갖지 못한다는 유비적 선언이 담겨있는 것이다. 물론, 각 사람의 고유성이 인정된다고 해도 그가 걷는 삶의 걸음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 상대적으로 쉬운 걸음도 있고, 어려운 걸음도 있고, 인간으로 다 헤아릴 수 없는 다양한 걸음들이 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사는 모양이 다르고, 직업이 다르고, 생김새가 다르고, 옷 입은 것이 다르다고 해도, 인간은 그 자체로서 같은 적어도 같은 인간에게서는 서로간에 인격적 존중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격적 존중이 있을 때, 삶의 실존 속에서 드러난 있는 그대로 다양하게 살아가는 풍경에 대한 존중도 가능할 것이다. 그렇다면, 모양이 어떠하든 모든 인간의 수고와 노고 역시도 그 자체로 인간에게 고유한 것이고, 각 인생들에게 있어서 차별을 생각할 수 없는 소중함이 내포되어 있다고 하겠다. 평생을 책상 앞에서 일하는 자나 평생을 흙과 더불어 사는 자나 그 삶의 풍경이 다르다고 해도, 그 수고와 노고의 의미는 같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인간이 다 헤아릴 수는 없기에 어떤 사람에게는 평생에 하는 수고와 노고가 헛된 것으로 돌아가고, 어떤 사람에게는 영원한 것을 찾고 발견하는 도구로 이용된다. 특별히, 성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은혜는 평생의 수고와 노고를 헛된 것으로 돌리지 않는다는데 있을 것이다. 분명히, 모든 인간은 일을 한다. 땀을 흘리고, 수고하고, 노고 속에서 평생을 살아간다. 그러나 이 삶의 모습은 불평의 내용도 아니고, 원망의 내용도 아니다. 더욱이, 성도라고 할 때 이 수고와 노고는 우리로 참되고 영원한 것들을 사모하고 발견하게 하는 내용으로 있다. 삶 속에 드러난 것들을 하나님이 은밀하게 숨겨놓으신 영원한 것을 사모하고 발견하는 고유한 삶의 도구들로 삼게 하는 것이다. 타락한 인생들을 곧바로 죽이지 아니하시고, 일을 통한 수고와 노고를 주심으로 타락 이전에 본래적으로 주어진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게 하시고, 그 마음으로 영원한 안식을 찾게 하는 가치로 지금도 여전히 남아있는 것이다.
“일하는 자가 그 수고로 말미암아 무슨 이익이 있으랴?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노고를 주사 애쓰게 하신 것을 내가 보았노라. 하나님이 모든 것을 지으시되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셨고 또 사람에게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의 시종을 사람으로 측량할 수 없게 하셨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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